예수님의 권세, 믿음과 증거, 마가복음 2장 묵상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 2장을 조용히 펼쳐 놓고 앉은 어느 아침, 예수님의 말씀이 전보다 깊숙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습니다. 논리와 증거로 가득 찬 세상 한복판에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신앙의 감각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습니다.

이 글은 그날 느꼈던 작지만 분명한 떨림을 따라, 예수님의 말씀과 믿음, 그리고 우리가 놓치기 쉬운 본질에 대한 다섯 가지 단상을 나누려 합니다.
1. “일어나 걸어가라” 이전의 선언
마가복음 2장은 기독교인이 오랜 신앙의 길을 걸어오면서도 쉽게 간과할 수 있는 본질을 꿰뚫는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하신 첫 말씀은 “일어나 걸어가라”가 아니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순서였다.
일반적인 기대는 먼저 병을 고치고 나서 영적인 선언을 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먼저 선포하심으로써 병든 자의 진정한 회복이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너의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간단한 한마디에 담긴 깊이를 나는 그동안 충분히 음미하지 못했다.
병든 자의 몸을 고치는 것보다, 그 안의 죄를 사하는 것이 먼저라는 말씀은 단지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향한 하나님의 시선을 보여주는 본질적인 메시지였다. 인간은 육체보다 더 먼저 영혼이 아프다는 진단, 그 진단 위에 서 있는 구원의 권세. 어쩌면 치유보다 더 큰 기적은 그 말 한마디에 담긴, 죄를 사하는 권세였는지도 모른다.
그날의 사건은 군중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중풍병자 자신에게도 충격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눈빛은 병자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사람들은 걷는 기적을 보고 놀랐지만, 나는 오늘 그 걷기 이전의 용서에 더 마음이 머문다. 우리가 걷기 전에, 우리의 죄가 용서되어야 한다. 살아가는 일이 단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자로서 걷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말의 무게
내가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는 솔직히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야, 신앙을 오래 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문장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다시 이 말씀 앞에 서니, 그 무게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지금껏 나는 얼마나 많은 신앙의 규칙들을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속하는 것’으로 사용해왔던가. 예를 들어, 청년 시절에는 주일에 예배만 참석하고 나면 일주일 동안의 신앙을 다 채운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형식은 있었지만, 사랑은 없었다. 그저 규칙을 지키는 데에 집중하다 보니, 옆에 앉은 지친 얼굴을 한 성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예수님은 그 말 한마디로 종교의 본질을 바꾸셨다. 단지 제도를 정비하신 것이 아니라, 질서의 중심을 다시 세우신 것이다.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속하는 것’으로 사용해왔던가. 예수님은 그 말 한마디로 종교의 본질을 바꾸셨다. 단지 제도를 정비하신 것이 아니라, 질서의 중심을 다시 세우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규칙에 기대어 신앙을 측정하는가. 매주 예배에 출석했는지, 정해진 시간에 기도했는지, 성경을 몇 장 읽었는지.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도리어 그 자체가 짐이 되고 만다.
예수님은 그 짐을 벗겨주셨다. 율법의 본질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사람을 향한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배운다. 사람을 향하지 않은 신앙은 결국 율법일 뿐이다.

3. 외계인, 신의 존재, 그리고 나의 기도
며칠 전 동네 모임에서 있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과학자이자 이웃인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외계인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신의 존재보다 많다.” 나는 그때 말문이 막혔다. 내 믿음을 논리로 꿰뚫는 듯한 그 말 앞에서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기도하는 동안 그 말의 본질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분은 자신의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그런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아침, 내가 그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내 신앙의 경험에 갇혀 절대적인 진리를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앙은 내 안의 작은 방 안에서만 자라고 있었다. 마치 창문을 닫고 외부의 소리와 빛을 차단한 채, 그 안에서만 하나님을 상상하고 해석하려 했던 것처럼. 방 안의 공기는 익숙하지만 점점 답답해지고, 그 안에서 자라는 신앙은 생명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나의 작은 방을 박차고 나가라고 한다. 마치 오래된 창틀을 열어 햇살과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듯, 그분의 말씀은 내 안의 고요한 방을 뒤흔들었다. 창문을 닫고 그 안에서만 하나님을 상상하듯이.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나의 작은 방을 박차고 나가라고 한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인간의 사고와 언어로 정의될 수 없는 분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은 예수님이라는 존재로 우리 가운데 오셨고, 우리와 함께 먹고 자고 울고 웃으셨다. 그분이 곧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다.

4. 증거로 믿는가, 믿음으로 증거를 보는가
우리는 증거를 원한다. 증거 없이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증거를 넘어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증거이며, 성령은 오늘도 그 진리를 믿는 자들 안에서 증거하고 계신다.
초대 교회의 제자들은 그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도 내어주었다. 피로 쓰인 증언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과학의 발전도 좋아하고, 증거와 논리를 존중한다. 그러나 신앙은 증명되지 않아도 진리일 수 있음을 배운다.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더라도, 그분의 존재는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우리는 믿음으로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역사와 임재,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회복과 변화의 영역이다. 어쩌면 그것이 진짜 현실인지도 모른다.

5. 신앙은 왜를 묻는다 – 과학은 어떻게를 묻는다
과학은 어떻게 세포가 나누어지는지를 설명한다. 하지만 왜 생명이 시작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과학은 물이 왜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지를 설명하지만, 왜 인간이 고통 속에서도 사랑을 찾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그 간극을 느낄수록 오히려 하나님을 더 믿게 된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깊은 신뢰를 준다.
나는 세상의 이치를 따르고, 우주의 원리를 배우지만, 그 모든 것 뒤에 계신 분을 신뢰한다. 예수님은 그 패러다임을 바꾸신 분이었다. 죄인이 먼저이고, 안식일이 뒤라는 선언은 신앙의 질서를 다시 쓰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선언은 지금 내 마음속 질서도 바꾸고 있다.

6. 신앙을 다시 정리하다 – 오늘의 결단
어제 오후, 정리해두었던 컴퓨터 파일이 갑자기 사라졌다. 작은 혼란스러움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정리할 용기를 얻었다. 단지 파일만이 아니라, 내 마음의 혼란도 함께 정리되었다.
나는 오늘도 사만다의 믿음을 위해 기도했고, 가족을 위한 기도를 조용히 이어갔다. 내 신앙이 멈춰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마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간다.
오늘 하루, 나는 묵상의 여운 속에서 사라진 파일을 다시 하나씩 정리하고, 조용히 커피를 내리며 다시 마음을 추슬렀다. 이 소소한 회복의 과정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꼈다.
예수님은 “걸어가라”고 하셨다. 그 말은 나에게도 해당된다. 오늘도 용서받은 자로서, 다시 일어나 걷는다. 걷는다는 것은 단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다시 믿는다. 증거가 아니라 믿음으로, 과학이 아닌 사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