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장은 진정한 믿음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삶 속에서 인내로 실천해 나가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믿음은 고난 속에서도 말씀을 붙들고 끝까지 인내할 때 비로소 열매 맺는 귀한 결실로 드러납니다.

좋은 땅에 뿌리내린 말씀, 믿음의 결실을 위한 인내
누가복음 8장 15절의 말씀은 내 영혼 깊숙이까지 스며들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말씀을 ‘듣고’만 있는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종종 좋은 의도를 품고 말씀을 듣지만, 그것을 지켜 인내하며 살아가는 데는 자주 실패한다. 결실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붙잡고 인내할 때 비로소 맺히는 것임을 이 구절이 말해주었다.
나는 언젠가 이런 장면을 마주한 적이 있다. 무심코 지나쳤던 화분에 물을 줄 때마다, 며칠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어 실망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화분에서 작고 여린 새싹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말없이 자라던 시간들이, 그 뿌리 내림의 시간들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믿음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씀을 들은 직후는 뭔가 큰 감동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 이후엔 침묵처럼 느껴지는 시간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도 믿음은 자란다. 말씀은 뿌리를 내리고, 인내는 가지를 뻗는다.
아침마다 말씀을 펼치는 습관이 들었지만, 삶의 분주함 속에 그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늘 어려웠다. 머리로는 기억하지만, 마음으로는 잊혀지고, 행동으로는 미루어졌다. 그렇게 지나온 나날을 떠올리면, 좋은 땅이 되지 못한 메마른 밭 같다는 자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러나 주님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매일 아침 새로운 말씀으로 내 안에 씨를 뿌리신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씨앗을 품고, 끝까지 버티며 기다리는 것. 마치 무더위 속에서도 물을 주며 키우는 화분처럼, 내가 내 영혼의 밭을 가꾸는 날들이 쌓일수록, 언젠가 진짜 결실을 보게 되리라는 희망이 다시 피어난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
예수님은 21절에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처음 들었을 때 단순한 선언처럼 들렸지만, 시간이 지나고 내 삶이 복잡해질수록 이 말의 의미는 점점 더 깊게 와 닿았다. 혈연보다 말씀에 반응하는 자가 더 깊은 관계라는 것, 그것은 세상에서 가족처럼 지내는 관계보다도 더 친밀한 영적인 유대감을 뜻하는 것이었다.
나는 믿음을 갖고 처음 교회에 발을 디뎠던 날을 떠올린다. 낯선 공간, 낯선 얼굴들, 익숙하지 않은 찬양과 말들.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한 이질감에 나는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조용히 다가와 내게 웃어준 한 사람, 예배 후 손을 잡고 “다음 주에도 꼭 오세요”라고 말해준 그 사람의 따뜻함은, 내게 가족이라는 단어의 새로운 의미를 심어주었다.
신앙생활 초기에 교회 안에서의 소속감을 갖기 어려워 외로웠던 적이 있다. 나와 다른 배경, 다른 말투, 다른 분위기의 사람들 속에서 나는 늘 어딘가 어색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주일 예배 후, 작은 순모임에서 누군가가 전한 말씀 한 마디가 내 마음을 열었다. “말씀을 듣고 살아내려 애쓰는 사람이면, 우리는 이미 가족이에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길은 혈통이나 자격이 아니라, ‘듣고 행함’에 있었다. 그 후로는 작은 실천이라도 게을리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남이 보든 말든, 나 스스로를 주님의 식구답게 살고자 하는 결단을 그 말씀에서 얻었다.

소외된 자를 향한 시선,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믿음
누가복음 8장에서 12년간 혈루증으로 고통받던 여인의 이야기는 내 마음 깊은 곳의 기억을 흔든다. 그 여인은 누구보다 간절했지만, 누구보다 조용히 다가가야 했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뒤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며시 만지는 장면은 너무도 섬세하고 절박하다. 그리고 그 순간, 병이 나았다.
몇 해 전, 교회에 처음 나온 청년 한 명이 있었다. 말수가 적고 낯을 가리는 그 청년은 예배가 끝나면 늘 조용히 자리를 떴다. 누군가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어 보였고,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저 수줍은 성격이라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평소처럼 교회 화단을 손질하고 있었을 때였다. 흙 묻은 내 손을 보며 조용히 다가오더니, 그가 내게 작은 종이컵에 담긴 물을 건넸다. “제가 뭐라도 돕고 싶었어요. 말은 잘 못하겠고, 그냥… 이렇게라도.” 그 말에 나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말 대신 내 모습을 지켜본 그의 마음이 느껴졌고, 주님의 옷자락을 붙든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 후로 그는 내가 무언가를 정리하거나 자리를 세팅할 때면 말없이 다가와 함께했다. 누구보다 조용했지만, 그의 손길은 언제나 정확했고, 그의 마음은 늘 따뜻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나와 함께 봉사하던 또 다른 자매가 말했다. “그 친구 보면 마음이 편해져요. 나도 말없이 뭔가 하고 싶어져요.”
내가 먼저 행동했을 뿐인데, 그것이 누군가에게 믿음의 모델이 되었고, 그 마음이 또 다른 누군가를 움직이게 했다. 그 조용한 청년은 나를 통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고, 그를 본 자매는 또다시 자신만의 옷자락을 향해 손을 뻗기 시작했다. 믿음은 때로 말이 아닌 모습으로, 설교가 아닌 뒷모습으로 전해지는 것임을 그들에게 배웠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이들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눈에 띄지 않아도, 다가와 말을 건네지 않아도, 그 마음의 갈망을 외면하지 않는 것. 예수님이 그 여인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라며 따뜻하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믿음을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