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묵상에서 배우는 삶의 자세 5가지: 계명을 실천하며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

마태복음 5장을 묵상하며 깨달은 계명을 실천하고 가르치는 삶의 자세 5가지에 대한 고찰입니다. 본문 말씀과 삶의 체험을 잇는 글을 통해 독자에게 진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마태복음 5장
마태복음 5장

 

예수님의 계명은 폐함이 아닌 완성의 초대였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귀를 스쳐 지나갈 때, 그것은 단지 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그 문장은 어쩐지 낯익은 목소리로 다가온다. 꼭 오래전에 잃어버린 편지를 다시 찾은 것처럼, 오래된 기억의 어떤 조각이 조용히 가슴을 두드린다.

어릴 적, 나는 교회에서 ‘율법’이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왠지 모르게 무겁고,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해야 할 일은 너무 많고, 하면 안 되는 일도 끝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인생의 여러 골목을 지나오며, 이 말씀은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율법은 나를 얽어매는 족쇄가 아니라, 내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인내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나를 향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계명을 남기셨다. 그리고 그것은 폐함이 아니라 완성의 길로 초대하는 부르심이었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계명 하나라도 지켜 행하며, 또 그렇게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 하셨다. 그 말씀이 요즘 따라 더욱 깊게 다가온다. 신앙생활이 길어질수록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알고만 있는가. 머릿속에는 수많은 성경 구절이 맴돌고, 입술은 성경 이야기를 익숙하게 쏟아낸다. 하지만 정작 내 삶은 그 말씀에 얼마나 닿아 있는가.

삶과 말씀이 동행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뿌리 없는 나무와도 같다. 겉으로는 싱그럽지만,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메말라가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보아왔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가르치는 자리, 봉사의 자리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해왔지만, 정작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진지한 태도는 자주 잊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도 부드럽게 말씀하신다. 계명은 나를 질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도구라고.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다시 계명 앞에 선다.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흔들리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는 분 앞에 나를 내어드린다. 그분의 완전함에 초대된다는 것은, 내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마태복음 5장
마태복음 5장

 

죄책감과 위로 사이에서, 가르침의 본질을 고민하다

대학 시절, 주일 아침이면 손에 성경책을 꼭 쥔 채 캠퍼스 교회로 향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교회의 대학부에서 목자로 섬기던 시절, 나는 매주 말씀을 준비하고 기도하면서도 늘 마음 한켠엔 죄책감이 머물렀다.

‘나는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 하루도 빠짐없이 마음속을 스쳤다.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발버둥쳤지만, 내 연약함은 생각보다도 끈질기고 지독했다.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고, 말씀을 전하며 격려했지만, 정작 내 안에는 해결되지 않은 상처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배가 내게 말했다. “자신이 다 해낼 수 있는 일만 가르친다면, 아무도 가르칠 수 없을 거야.” 그 말은 마치 어두운 골목길 끝에서 불쑥 켜진 가로등처럼 내 마음에 환한 빛이 되었다. 나는 부족했고 지금도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나를 통해서도 일하신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말은 위로를 넘어 책임으로 다가왔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함께 견디고 걸어주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배웠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늘 말씀 앞에 먼저 무너져야 한다는 것도.

지금도 여전히 나는 불완전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부끄러워만 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 연약함이 나를 하나님께 더 깊이 기대게 만들고, 그 기대함이야말로 진짜 가르침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걸 안다.

마태복음 5장
마태복음 5장

 

조용한 삶을 택한 내가 말씀을 나누는 이유

나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 많은 곳이 불편했다. 반 아이들이 짝지어 웃고 떠드는 동안, 나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던 아이였다. 학창 시절의 나를 누군가는 ‘무던한 아이’라고 불렀고, 또 누군가는 ‘심심한 아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 시간들이 내게 얼마나 편안하고 따뜻한 시간이었는지를 말하지 못했다. 북적이는 세상보다 고요한 벽 한 켠이 더 어울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으니까.

세월이 흘러 그런 나에게도 누군가에게 ‘말씀을 전한다’는 역할이 주어졌을 때, 나는 많이 망설였다. 시끌벅적한 교제, 열정적으로 손을 들고 찬양하는 분위기보다는, 창가에 앉아 조용히 성경 한 구절을 곱씹는 일이 더 익숙한 나였다. 그래서 말씀을 나누는 자리에 섰을 때, 나는 그저 내가 가진 소소한 삶의 경험과 그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내게 “왜 그렇게 조용한 사람이 말씀을 전하려 하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조용한 사람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오히려 더 조용하기에 말보다 깊은 침묵을 배웠고, 그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을.

나는 떠들썩한 강연보다 한 장의 손편지처럼 말씀을 전하고 싶다. 누군가 하루의 끝자락에,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힌 그 조용한 시간에 내 글을 읽고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 나는 그 조용한 방식으로 사랑을 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나를 받아주시고, 기뻐하시리라 믿는다. 말보다 깊은 진심은 언제나 삶 속에 있고, 조용한 사람이 전하는 진심은 오히려 더 오랫동안 기억되기 마련이니까.

마태복음 5장
마태복음 5장

 

계명을 실천하는 삶, 말보다 큰 가르침이 된다

나는 요즘 뉴스 속 교회 이야기를 보면 마음이 무겁다. 말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삶으로는 그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이들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교회 지도자의 비리, 탐욕, 이중적인 삶이 공개될 때마다, 복음은 그 빛을 잃고 사람들의 마음은 멀어진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작은 계명을 지키는 자’는 어디에 있는 걸까, 나부터 그 물음 앞에 서게 된다.

삶으로 가르치는 것이 말보다 크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작고 일상적인 순간에서 배웠다. 동네 슈퍼에서 늘 먼저 인사하던 아주머니, 빗길에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주던 이름 모를 청년,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고도 모른 척하던 이들. 그들의 행동은 말 한마디보다 따뜻했고, 오래 기억에 남았다. 예수님이 원하신 계명의 실천은 아마도 그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나 역시 하루를 살면서 작지만 분명한 실천을 마음에 새긴다. 쓰레기를 주우며 “누가 보겠어?”라는 마음을 내려놓고, 엘리베이터 문을 붙잡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이 누군가에겐 오늘 하루를 다르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것이 복음의 시작이고, 계명의 실천이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큰 가르침을 주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 삶을 통해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구나’ 하는 조용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교회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예수님처럼 조용히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삶. 그것이 말보다 큰 설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오늘도 작은 실천을 마음에 품는다.

 

마태복음 5장
마태복음 5장

 

마태복음 5장 묵상은 지금의 나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마태복음 5장은 언제나 나를 가르친다. 그 말씀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고, 한편으론 위로를 받기도 한다. 이 말씀 앞에서 나는 스스로를 성찰하게 된다. 내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얼마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어떤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다.

‘가르치는 자’라는 타이틀은 생각보다 무겁다. 누군가에게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단지 정보를 나누는 일이 아니다. 내 삶으로, 내 태도로, 그리고 내 실수조차도 그들의 눈에 비치는 하나의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떨린다. 나는 과연 그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

그런데 마태복음 5장은 그렇게 나를 자책하게만 두지 않는다. 이 말씀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나를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그 완전함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도록 손을 내미는 초대처럼 다가온다. 나는 아직 미숙하지만, 주님의 은혜 안에서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다는 그 믿음 하나로 오늘을 견딘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도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부족함 속에서도 말씀에 기대어 살아가려는 그 마음이 이미 하나님께는 아름답다고. 나 역시 여전히 흔들리며 걷고 있지만, 그 말씀 안에서 나를 붙드는 손이 있음을 믿기에 오늘도 걸어간다.

우리가 함께 그렇게 걸어갔으면 좋겠다. 말보다 삶으로, 이론보다 실천으로, 두려움보다 사랑으로. 마태복음 5장은 그 여정의 시작점이자, 끝까지 우리를 인도하는 빛이다. 그 빛을 따라 오늘도 묵묵히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마태복음 8장 묵상: 백부장의 믿음, 죽은 자, 장례의 의미에 대한 5가지 통찰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