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장에서 배우는 신앙과 상징, 믿음의 원리 4가지

마태복음 2장은 동방 박사들의 방문과 경배, 그리고 별의 인도라는 신비로운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글은 마태복음 2장에서 배운 믿음의 본질과 상징의 의미, 신앙의 성장 과정을 돌아보는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묵상 글이다.

 

마태복음 2장
마태복음 2장

 

별을 따라간 믿음, 상징을 넘어서는 시선

마태복음 2장 9절에서 11절, 동방 박사들이 별을 따라가다 마침내 그 별이 머문 곳에서 아기 예수를 경배한 장면은 언제나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유년 시절엔 단순히 반짝이는 별이 실제로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였다고 믿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특별한 빛, 천사의 손길로 인도된 박사들의 여정이 마치 동화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고, 나는 그 아름다운 이야기에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이 깊어진다는 건, 때로는 의심의 문턱을 건너는 일이라는 걸 나는 대학부 시절에 알게 되었다. 그때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한 선배가 문득 내게 던진 질문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신학 대학원생이었고, 말끝마다 생각의 여백을 남기는 사람이었다. “정말로 별이 움직였다고 생각하냐?”는 그의 물음은, 그 순간 내 안의 어떤 믿음과 충돌했다.

나는 곧바로 반박했다. 성경 무오설을 굳게 붙든 채,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일이 사실이며 과학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내 안에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겠다는 진심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진심은 어쩌면 아직은 단단하지 못한 벽처럼, 부서지기 쉬운 확신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렀다. 삶의 고개를 몇 번 넘고, 신앙의 흔들림을 견디고, 성경을 수없이 다시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그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지금은 다르다. 그 질문이 내 신앙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있게 만들어주었음을 이제는 안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다. 성경은 문자 너머의 진리를 품은 하나님의 숨결이다. 별이 실제로 움직였는지, 어떤 천문학적 현상이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별이 사람들의 시선을 어디로 이끌었는가이다. 동방 박사들은 별을 따라갔고, 그 끝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지금 내 삶에 있어서 ‘별’은 무엇인가. 무엇이 나의 시선을 움직이고, 나의 발걸음을 이끌고 있는가. 때로는 화려한 목표나 세속적인 성공이 별처럼 보여 그것을 쫓아가지만, 그 끝에는 공허만이 남을 때가 많았다. 진짜 별은, 나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나의 자랑을 벗겨내고, 무릎 꿇게 만들고, 입술로 고백하게 만드는 그 별 말이다.

동방 박사들은 경배했다. 아기 예수 앞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며 머리를 숙였다. 세상의 지혜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가장 큰 진리를 만나는 장면이다. 그들이 드린 예물보다도, 그들의 몸짓과 시선이 나를 울린다. 별이 머문 자리 앞에서, 그들은 자신의 모든 해석을 내려놓고 그저 예배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 내 삶에 다시 나타난 별을 따라, 복잡한 해석이나 논리보다 더 깊은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 누군가 내게 묻더라도, “별이 진짜 움직였다고 믿느냐?”는 질문에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별이 움직였는지보다, 그 별이 나를 어디로 이끌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요. 그리고 저는 그 별을 따라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그 고백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마태복음 2장
마태복음 2장

 

신앙의 본질, 문자보다 깊은 믿음

돌이켜보면, 그 시절 나는 성경을 마치 교과서처럼 대했다. 구절 하나하나가 정답이자 절대 명제였고, 여백도, 여운도, 질문도 허락되지 않는 그런 책이었다. 오타 하나도 용납할 수 없는, 완벽한 논리로 무장된 문서처럼 말이다. 나는 믿었다. 모든 것이 정확히, 문자 그대로 일어난 사실이며, 그것을 의심하거나 유연하게 해석하는 것은 곧 신앙을 흔드는 위험한 길이라고 여겼다.

그러한 태도는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성처럼 느껴졌지만, 결국에는 쉽게 판단하고 쉽게 정죄하는 신앙으로 이어졌다. 내 기준에 맞지 않는 해석을 하는 사람을 마음으로 몰아내고, 나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은근히 불편해했다. ‘저건 성경적이지 않아’라는 말이 내 입술에서 자주 튀어나왔고, 그렇게 나는 진리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믿음을 잘라내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몇 번의 삶의 고개를 넘고 나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믿음이란, 이해를 넘어서는 신뢰라는 사실을. 믿음은 모든 것을 논리로 풀어내는 힘이 아니라, 풀리지 않는 질문 앞에서 하나님을 놓지 않는 끈기라는 것을. 그 깨달음은 빠르게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기도와 좌절, 그리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들 속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마음이 깨어지며 찾아온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성경이 단지 명제들의 집합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성경에는 상징과 은유가 있고, 침묵과 여백이 있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는 숨결이 있다. 하나님은 때로 말하지 않으심으로 말씀하시고, 어떤 진리는 설명보다 침묵 속에서 더 분명히 다가온다.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그 안에 담긴 은유와 상징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바람에 날리는 겨자씨 하나, 돌에 떨어진 씨앗, 양 한 마리, 들의 백합화—이 모든 것이 단지 설명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향한 초대장이었다. 나는 조금씩 이해보다는 ‘경청’하는 자세로 성경 앞에 앉게 되었다.

성경은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왜’의 질문에 답하는 책이다. 어떻게 세상이 만들어졌는가보다, 왜 내가 지금 여기 살아 있는가를 묻는 책.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와 같은 질문 앞에, 성경은 정확한 정답을 주기보다는 길을 보여준다. 그 길은 때로 광야 같고, 때로는 어둠 속 같지만, 그 길 위에 주님의 발자국이 남겨져 있다.

그 깊이는 단지 문자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삶의 체험과 기도의 시간 속에서 비로소 빛을 발한다. 성경은 정답의 책이 아니라, 동행의 책이다. 하나님과 함께 길을 걷는 이들에게 순간순간 펼쳐지는 풍경 같은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성경을 정답지로 대하지 않는다. 대신 그 안에서 울고, 웃고, 흔들리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과 함께 나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묻는다. “주님, 오늘은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에 꼭 답이 없어도 괜찮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장
마태복음 2장

 

신앙의 혼란과 성장, 그리고 벌거벗겨짐

유튜브 강의를 통해 신학의 언저리를 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지 교회에서 듣던 설교의 연장선일 줄로만 알았던 그 말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나의 믿음 전체를 뒤흔드는 질문으로 다가왔다. ‘왜?’라는 질문이 자꾸만 꼬리를 물었고, 그 질문들은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만큼 내 안을 두드렸다.

책장을 넘기며 만난 인문학은 전혀 다른 언어로 삶과 세계를 말하고 있었고, 인터넷을 통해 접한 수많은 담론들은 내가 자라온 교회 울타리 밖의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알려주었다. 한때는 ‘이 안에 진리가 있다’고 확신했던 신앙이 점점 작은 방처럼 느껴졌고, 그 안에서 나는 숨이 막혀왔다.

처음엔 혼란이었다. 무너짐에 가까웠다. 내가 믿어온 것, 붙들어온 것, 선한 것이라 여겼던 많은 신념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느낌. 그 허물어짐 앞에서 나는 절망했다. 기도할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앉아, 무너진 마음의 파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혼란이 결코 나를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하나 벗겨짐’의 시간이었다. 믿음이란, 안전한 성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들판에 나와 벌거벗은 채 하나님의 손에 나를 내어맡기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과정은 말할 수 없이 아팠다. 내가 그토록 꽉 붙들고 있던 신념이 하나씩 빠져나갈 때마다, 마치 피부가 벗겨지는 것 같은 상실감과 수치심이 몰려왔다. “내가 지금까지 틀렸던 걸까?” 하는 두려움과, “그럼 이제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지?” 하는 막막함 속에서, 나는 깊은 어둠을 통과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둠 한가운데서 나는 처음으로 진리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신앙이란, 내가 확신하는 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확신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 상태라는 것을,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는 안다. 내가 붙드는 신앙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이 붙드시는 나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신앙은 내가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감싸안고 있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성장은, 어쩌면 옷을 더 입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더 많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내가 알던 모든 것을 의심하며 처음으로 돌아가는 용기. 그렇게 다시 시작하며, 나는 여전히 믿는다. 하나님은 나를 무너뜨리시는 분이 아니라, 새롭게 지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 무너짐 속에서 나는 자라고 있었고, 그 자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손길 아래, 오늘도 나는 껍질을 하나씩 벗으며 진짜 믿음의 뼈대를 세워가고 있다. 흔들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고, 혼란은 저주가 아니라 초대였다—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더 깊은 신앙의 자리로.

 

마태복음 2장
마태복음 2장

 

성경을 읽는 새로운 자세, 질문에 열려 있는 믿음

이제는 성경을 읽을 때, 나의 고정된 틀을 내려놓는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증명하듯 성경을 들여다보았다. 말씀이 내 손에 쥐어져야만 안심했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마치 믿음이 흔들리는 것처럼 불안해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지만, 내 이해는 언제나 제한적이라는 것을. 그분의 진리는 나의 좁은 틀에 갇히지 않고, 그 너머로 흘러간다는 것을. 그래서 요즘 나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나의 고정된 해석을 잠시 내려놓는다. 그것은 내려놓음이자, 동시에 열어놓음이다.

성경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드러내신 이야기이자,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숨결이 맞닿는 신비한 공간이다. 상징은 단지 상징으로 끝나지 않고, 그 안에 숨은 하나님의 뜻이 있다. 모세가 들었던 불타는 떨기나무, 엘리야가 마주한 세미한 음성, 그리고 동방 박사들을 인도한 별. 이 모든 상징은 하나의 진리를 향해 손을 뻗는다.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나 결코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깊이로 말씀하신다.

별을 따라 걸었던 동방 박사들처럼, 우리도 하루하루 신앙의 여정을 걸어간다. 그 여정은 늘 명확하지 않다. 구름이 낀 날도 있고, 별빛이 아예 보이지 않는 날도 있다. 어떤 날은 별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지도 모른 채 그저 발을 떼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별이 실제로 움직였는지 여부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 별이 우리의 시선을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는 것이다. 믿음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움직임이 아니라, 마음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있다.

이제는 질문이 두렵지 않다. 예전 같으면 신앙 안에서 질문을 갖는 것조차 죄처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믿음은 질문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질문을 품고도 하나님을 붙드는 행위임을. 더 많은 질문과 더 깊은 묵상이 있을수록, 내 신앙은 더 살아있는 것이 된다. 흔들림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시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확신보다 간절함이 더 클 때, 그분은 내 마음을 어루만지시며 진리의 빛으로 나를 이끄신다.

하루하루 말씀 앞에 선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다. 그것은 내 영혼에 숨을 불어넣는 시간이며, 하나님과 마주하는 가장 정직한 자리다. 무릎을 꿇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음성들이 있고,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빛이 있다. 말씀 앞에 선다는 것은 그래서 늘 떨리는 일이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내 감정에 지배당해 무너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으시고, 말씀을 통해 나를 다시 일으키신다.

성경은 그 자체로 완성된 책이 아니라, 내가 읽어야만 살아나는 책이다. 그 안의 글자들은 내가 만나는 상황, 나의 시간, 나의 눈물과 웃음 속에서 새롭게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나는 매일 말씀 앞에 선다. 같은 구절을 백 번 읽었더라도, 오늘의 나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기에.

그리고 나는 믿는다. 하나님은 오늘도 내 시선을 붙드시고, 내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물으신다. 나의 눈길이 세상의 인정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는지를, 그분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물으신다. 그리고 내가 흔들릴지라도, 다시 그분을 바라보기만 한다면, 나의 걸음은 다시 제 방향을 찾게 될 것이다.

말씀 앞에 선다는 것. 그것은 내 신앙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를 맡기는 일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다 알 수 없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며, 다시 오늘을 걷는다. 그 걸음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걸음 끝에 진리가 서 있다.

마태복음 2장
마태복음 2장

 

마태복음 2장, 믿음의 본질을 다시 묻다

마태복음 2장은 내가 지금 믿고 있는 신앙의 본질을 되짚어보게 한다. 확신은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신뢰에서 우러나올 때 비로소 그 의미가 깊어진다. 이 말씀을 대할수록, 믿음은 단지 지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의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자라나는 것임을 깨닫는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더 겸손해지고, 알면 알수록 더 무릎을 꿇게 되는 신앙.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 겸손이 믿음의 뿌리가 되어 흔들림 없이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마음을 적신다.

그렇게 마태복음 2장은 내게 확신보다 더 깊은 겸손을 가르쳐주며, 하나님 앞에 나를 내어놓게 만든다.

 

마태복음 2장
마태복음 2장

 

마태복음 2장으로 시작되는 오늘의 기도

마태복음 2장으로 시작되는 오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내 시선을 오직 예수님께로 향하게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세상의 수많은 질문과 신앙적 혼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분을 따를 수 있도록, 나의 믿음이 더 깊고 단단해지기를 기도한다.

오늘도 나는 별을 따라 걸었던 동방 박사들처럼, 진리를 향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간다. 때론 내가 걷는 길이 어둡고 고요하여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쓰신 말씀과 삶의 흔적들이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그 길 위를 묵묵히 걸어간다.

그 안에서 나는 오늘 하루를 겸손히 살아내며, 말씀 앞에서 조용히 머문다. 별빛보다 밝은 진리의 빛이 오늘도 나를 비추길 소망하며.

 


예수님의 권세와 믿음의 본질을 새롭게 이해하는 5가지 통찰 – 마가복음 2장 묵상에서 얻은 과학, 증거, 믿음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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